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뤼순 공방전 (문단 편집) === 뤼순 항복 === >'''"위대하신 황제 폐하,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되 자비를 베푸소서."''' >---- >스테셀이 니콜라이 2세에게 패전을 알리기 위해 보낸 전문의 첫 구절. 출처: 이윤섭. <일본 100년사>. 아이필드. 2016년. p.129. 이령산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이곳에 포병을 배치하여 뤼순을 포격했고, 다수의 포탄이 병원과 입원실이 있는 건물에 명중하였다. 장기간의 포위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이로인해 티푸스, 괴혈병, 야맹증 환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12월 15일, 일본군은 외곽에 남아있는 보루에 대해 지하에 파 놓은 참호에서 가죽벨트를 태워 유독가스를 발생, 러시아군 갱도로 스며들게 하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을 밀어냈다. 이에 방어전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이 해당 보루로 직접 가서 정황을 확인하고 귀환하던 와중에 실시된 일본군의 포격에 의해 전사하였다. 이는 요새수비대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의 사망을 의미하였으며, 러시아군의 방어 의지를 크게 꺾는 계기가 되었다. 콘드라첸코 소장의 육지방어 총사령관 지위를 대체한 것은 알렉산드르 포크 소장이었다. 그는 진저우에서 뤼순까지 퇴각하는 과정에서 무능력함을 보였기에 병사들의 신임을 잃었던 인물이었고, 이후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전방 보루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밀려나게 되었다. 1월 1일, 러시아군 지휘부는 뤼순의 주방어선 중 가장 강력했고, 가장 오랫동안 버텼던 동쪽 방면의 주방어선까지 포기하고 일본군과 항복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직 전의를 잃지 않았던 잔존 수비대원들은 반발하였으나 이내 사그러들었고, 1월 2일 오후 7시, 러, 일 양측은 뤼순항의 항복문서에 서명하였고, 공식적인 항복은 1월 4일에 이루어졌다. 뤼순항에 남아있었던 제1태평양함대 함선들 대다수는 뤼순항에 대한 포격 과정에서 파손되거나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들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사실상 전략적 의미는 사라졌다. 일본측은 전후 뤼순항에 가라앉은 함선들을 다시 건져서 개량,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